국제 성소수자 인권선언이 만들어진 곳
반둥에서 기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 자바 섬 중심의 욕야카르타에 도착했습니다. 과거에는 '족자카르타'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던 도시죠. 공식 명칭이 바뀐 지금에도 '족자'라는 명칭은 광범위하게 통용되고 있고요.
제가 굳이 먼 길을 달려 욕야카르타에 온 것은 단 한 가지 이유였습니다. 보로부두르 불탑을 보기 위함이었죠.
자바 섬에 인류가 거주한 역사는 아주 깊습니다. '자바 원인(原人)'으로 불리는 원시 인류의 화석이 자바 섬에서 발견될 정도니까요. 여러 왕국이 자바 섬에서 생겨나고 몰락했습니다. 남아있는 비문과 외부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6~7세기까지 여러 지방 정권이 성장했다고 합니다.
7세기경 자바 섬의 서쪽에는 힌두교를 믿는 순다 왕국이 들어섰습니다. 유사한 시기 바다 건너 수마트라 섬에서 불교를 믿는 스리비자야 왕국이 세워졌죠. 무역으로 성장한 스리비자야 왕국은 곧 자바 섬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불교가 자바 섬에도 들어왔죠.
스리비자야가 수마트라와 자바 서부에서 흥기하는 사이, 자바 동부에도 왕조가 세워집니다. 대표적인 세력이 마타람 왕국이죠. 수마트라, 자바 서부, 자바 동부에서 성장한 이들 왕조는 때로 서로를 정복하고 때로 화친하며 각축전을 이어나갑니다.
그리고 이 마타람 왕국의 수도가 바로 욕야카르타였습니다. 그리고 이 왕조가 남긴 거대한 유산이, 보로부두르 불탑입니다.
보로부두르 불탑은 동서로 140m, 남북으로 140m의 정사각형 형태로 만들어진 거대한 사원입니다. 아래부터 사각형으로 5개의 기단을 쌓았고, 그 위에 원형으로 3개의 기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73기의 거대한 스투파가 올려져 있는 구조죠.
탑은 그 자체로 수미산을 상징하고, 구조는 만달라를 형상화했습니다. 기단부에는 여러 부조를 새겨 두었죠. 가장 아래에는 세속의 모습을 보여주는 부조가 있고, 그 위에는 석가모니의 전생과 현생을 그린 부조가 있습니다. 그 위에는 경전의 내용을 묘사했습니다. 이와 함께 감실을 만들어 불상을 모셨습니다. 이 불상은 많이 파괴되거나 발굴 초기 약탈되기도 했습니다.
보로부두르 불탑은 세계에서 가장 큰 불교 사원이자, 동남아시아 최고의 고고학 유적 중 하나입니다. 저 역시 학교에서 불교미술사를 배울 때면 언제나 봤던 작품이지요. 동서남북 각 방향에 따라 다른 형태의 불상이 배치되는 오방불은 시험기간이면 항상 암기했던 기억도 납니다. 손 모양만 보고도 어느 방향에 놓인 불상인지 알아야 하니까요. 지금 와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말이죠.
이렇게 거대하고 중요한 유적이지만, 사실 보로부두르는 오랜 기간 잊힌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욕야카르타를 수도로 했던 마타람 왕국은 곧 수도를 더 동쪽으로 옮깁니다. 도서부 자바와의 경쟁 때문이라고도 하고, 화산 활동에 따른 자연재해 때문이라고도 하죠.
서부 자바와 수마트라는 한동안 인도 촐라 왕조의 공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기도 합니다. 14세기 동부 자바에서는 마타람 왕국을 대체한 마자파힛 왕국이 등장합니다. 그렇게 정치적 혼란이 이어지는 사이, 보로부두르는 정글 속에 묻혀 갔습니다. 존재는 알려져 있었지만, 이슬람 왕조가 들어서며 굳이 관리하거나 보호할 이유가 없는 유적이 된 탓도 있고요.
마자파힛 왕국은 한때 강성한 왕조를 꾸렸지만, 지방 술탄국의 성장으로 분열하며 몰락합니다. 수많은 술탄국이 수마트라와 자바 섬에 들어섰죠. 혼란의 와중에 욕야카르타에도 '욕야카르타 술탄국'이라는 지방 정권이 만들어졌습니다.
욕야카르타 술탄국은 네덜란드의 지배에 저항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이 벌어졌고, 네덜란드의 동인도 식민지는 영국이 대신 관리하게 되죠. 이때 자바 섬에 닿은 영국이 욕야카르타를 공격합니다. 성은 쉽게 무너졌습니다. 이 침공을 주도한 사람이, 후일 싱가포르를 세우는 스탬포드 래플스였습니다.
보로부두르가 다시 '발견'된 것도 래플스에 의해서였습니다. 현지인에게 보로부두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조사를 명령한 것이죠. 화산재와 밀림에 뒤덮여 있던 이 불탑이 완전히 발굴된 것은 20여 년이 지난 1835년의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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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굳이 먼 길을 달려 욕야카르타에 온 것은 단 한 가지 이유였습니다. 보로부두르 불탑을 보기 위함이었죠.
자바 섬에 인류가 거주한 역사는 아주 깊습니다. '자바 원인(原人)'으로 불리는 원시 인류의 화석이 자바 섬에서 발견될 정도니까요. 여러 왕국이 자바 섬에서 생겨나고 몰락했습니다. 남아있는 비문과 외부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6~7세기까지 여러 지방 정권이 성장했다고 합니다.
7세기경 자바 섬의 서쪽에는 힌두교를 믿는 순다 왕국이 들어섰습니다. 유사한 시기 바다 건너 수마트라 섬에서 불교를 믿는 스리비자야 왕국이 세워졌죠. 무역으로 성장한 스리비자야 왕국은 곧 자바 섬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불교가 자바 섬에도 들어왔죠.
스리비자야가 수마트라와 자바 서부에서 흥기하는 사이, 자바 동부에도 왕조가 세워집니다. 대표적인 세력이 마타람 왕국이죠. 수마트라, 자바 서부, 자바 동부에서 성장한 이들 왕조는 때로 서로를 정복하고 때로 화친하며 각축전을 이어나갑니다.
그리고 이 마타람 왕국의 수도가 바로 욕야카르타였습니다. 그리고 이 왕조가 남긴 거대한 유산이, 보로부두르 불탑입니다.
보로부두르 불탑은 동서로 140m, 남북으로 140m의 정사각형 형태로 만들어진 거대한 사원입니다. 아래부터 사각형으로 5개의 기단을 쌓았고, 그 위에 원형으로 3개의 기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73기의 거대한 스투파가 올려져 있는 구조죠.
탑은 그 자체로 수미산을 상징하고, 구조는 만달라를 형상화했습니다. 기단부에는 여러 부조를 새겨 두었죠. 가장 아래에는 세속의 모습을 보여주는 부조가 있고, 그 위에는 석가모니의 전생과 현생을 그린 부조가 있습니다. 그 위에는 경전의 내용을 묘사했습니다. 이와 함께 감실을 만들어 불상을 모셨습니다. 이 불상은 많이 파괴되거나 발굴 초기 약탈되기도 했습니다.
보로부두르 불탑은 세계에서 가장 큰 불교 사원이자, 동남아시아 최고의 고고학 유적 중 하나입니다. 저 역시 학교에서 불교미술사를 배울 때면 언제나 봤던 작품이지요. 동서남북 각 방향에 따라 다른 형태의 불상이 배치되는 오방불은 시험기간이면 항상 암기했던 기억도 납니다. 손 모양만 보고도 어느 방향에 놓인 불상인지 알아야 하니까요. 지금 와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말이죠.
이렇게 거대하고 중요한 유적이지만, 사실 보로부두르는 오랜 기간 잊힌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욕야카르타를 수도로 했던 마타람 왕국은 곧 수도를 더 동쪽으로 옮깁니다. 도서부 자바와의 경쟁 때문이라고도 하고, 화산 활동에 따른 자연재해 때문이라고도 하죠.
서부 자바와 수마트라는 한동안 인도 촐라 왕조의 공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기도 합니다. 14세기 동부 자바에서는 마타람 왕국을 대체한 마자파힛 왕국이 등장합니다. 그렇게 정치적 혼란이 이어지는 사이, 보로부두르는 정글 속에 묻혀 갔습니다. 존재는 알려져 있었지만, 이슬람 왕조가 들어서며 굳이 관리하거나 보호할 이유가 없는 유적이 된 탓도 있고요.
마자파힛 왕국은 한때 강성한 왕조를 꾸렸지만, 지방 술탄국의 성장으로 분열하며 몰락합니다. 수많은 술탄국이 수마트라와 자바 섬에 들어섰죠. 혼란의 와중에 욕야카르타에도 '욕야카르타 술탄국'이라는 지방 정권이 만들어졌습니다.
욕야카르타 술탄국은 네덜란드의 지배에 저항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이 벌어졌고, 네덜란드의 동인도 식민지는 영국이 대신 관리하게 되죠. 이때 자바 섬에 닿은 영국이 욕야카르타를 공격합니다. 성은 쉽게 무너졌습니다. 이 침공을 주도한 사람이, 후일 싱가포르를 세우는 스탬포드 래플스였습니다.
보로부두르가 다시 '발견'된 것도 래플스에 의해서였습니다. 현지인에게 보로부두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조사를 명령한 것이죠. 화산재와 밀림에 뒤덮여 있던 이 불탑이 완전히 발굴된 것은 20여 년이 지난 1835년의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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